Page 66 - 건축구조 Vol. 29 / No. 04
P. 66

회원 칼럼  |  0 2






           구조설계 단계에 따라 달라지는 VE의 가치                               할 것이다.
                                                                  구조기술사라는 “인간 전문가”가 미래에도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VE는
            VE는 무엇인가? VE는 구조설계의 합리성을 제고하여 공사원가를 낮추               구조계산 이전, 구조계획 단계의 VE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조계획 보
           고 건물의 품질을 높이는 일이다.                                    다는 구조계산에만 천착하는 구조 전문가가 많다. 건축사한테서 도면을 받
            구조설계를 주말 외출에 비유해 보겠다. 길이 막히는 주말 낮에 지인의               으면 구조계획적 측면에서의 거시적 판단은 없이 그저 주어진 건축 평면도
           결혼식에 가려고 한다. 지하철-버스-택시-자차운전 중 교통비와 시간을                에 표시된 기둥끼리 큰 보를 걸고 대충 간격 떼서 작은 보를 걸면 구조계산
           종합적으로 가장 절약하면서 쾌적하게 왕래할 만한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                이 끝난 줄 안다. 슬래브 스팬은 그 결과로 저절로 결정된다. 그 과정에 전
           이 “구조계획”이다.                                           문가 엔지니어로서의 고민은 없다.
            “구조계획” 단계에서 내 차를 가져가기로 결정했다면 어떤 경로를 택할                이러니 구조설계의 수준이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 것
           것인지 - 내비게이션에서 최단 시간 코스와 통행요금 절약 코스 중 어떤               이다.
           쪽을 선택할지, 아니면 내비게이션을 끄고 나의 길눈에 의지할 것인지 결                구조기술사처럼 자격증으로 밥그릇을 어느 정도 보호받는 직업은 “하던
           정하는 것이 “구조계산” 단계에 해당할 것이다.                            대로 하면 된다”라는 매너리즘에 빠져 바깥 세상의 변화에 둔감해지기 쉽
            건설회사나 건축설계사는 물론이고 우리 구조설계자들 사이에서도 흔                  다. 그러나 베테랑 택시 기사가 서울시내 지리와 교통흐름을 아무리 빠삭
           히들 VE를 “마른 걸레를 한 번 더 쥐어짜는” 과정, 즉 이미 정해진 구조“계          하게 알아도 수십 개의 인공위성과 빅데이타 분석으로 최적 경로를 제시
           획”은 기정사실로 놓고 구조“계산”을 더 빡빡하게 다시 하여 구조 기준의              하는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따라가는 초보운전자가 목적지에 더 빨리 도
           허용 범위 내에서 어떻게든 부재 물량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과정으로만               착할 가능성이 높아진 지 오래다. 게다가 이제 불과 몇 년 후면 운전석 핸
           생각하고 있다.                                              들과 페달 자체를 컴퓨터에게 양보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꼼꼼하게 실수
            과거에는 구조계산 과정에서 설계의 묘를 살려 공사비의 절감을 이끌어                없이 구조“계산”을 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안주하고 있다 보면 이제 곧
           낼 여지가 꽤 많았고, 돈만 아낄 수 있다면 다른 가치들은 어느 정도 희생             다른 구조기술사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꼼꼼하고 실수 없는 것으로는
           되는 것을 당연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는 컴퓨터와 경쟁해야 한다. 과연 승산이 있
            임대 아파트 건설로 크게 성공한 선배 한 분은 평형별로 건축설계는 물               을까?
           론 구조계산서까지 “표준설계”로 미리 만들어놓고 새로 짓는 아파트마다
           표지만 갈아 끼워서 건축허가를 받아 설계비를 절약하기도 했다. 그 “표준              인공지능 시대에 대응하는 구조기술사의 생존전략
           설계”라는 것은 입주자의 동선이나 이용편의를 생각하기보다는 표준 규격
           건축자재를 절단 등 가공할 필요 없이 납품된 그대로 100% 사용함으로써               건축사는 건축주, 즉 돈을 가진 인간의 의도를 설계도로 그려냄으로써
           자재 활용률을 극대화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나도 공군 건설장교로 근무               인간과 기계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건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하던 시절에 비슷한 방법으로 자재를 절감하여 상관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               것이므로 AI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 건축주는 중요하고 비싼 건물일
           던 기억이 있다.                                             수록 인간의 심리를 AI보다 잘 이해하고 소위 “감각 있는” 인간 건축사에
            그러나 이처럼 낭비되는 자재가 없는지 꼼꼼히 살펴 자재 로스를 줄이                게 설계를 맡길 것이다.
           고 안전율을 깎아 부재 단면을 줄이는 구조“계산”단계에서의 VE에서 더                구조기술사는 어떨까? 구조기술사가 여행자(=건축주, 시공사)의 상황
           발전이 없이 머물러 있다가는 구조기술사의 밥줄이 끊기는 것은 시간문제                에 꼭 맞는 최적의 여행계획을 제시하는 고차원적인 Value Engineering을
           이다. "마른 걸레 쥐어짜기"라는 종목에서 인간은 컴퓨터를 이길 수 없기              제공하지 못하고 그저 이미 정해진 이동수단(=공법 및 구조계획) 내에서
           때문이다. 구조계산 단계에서의 VE는 구조해석 프로그램에 탑재되는 AI               내비게이션(=대충 넘어가는 경우란 없는 설계 자동화 프로그램)과 도착시
           가 고도화될수록 구조기술사의 가치판단이 필요한 전문 영역이 아니라 기                간을 경쟁하는 택시 기사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20년 후에는 AI에게 대체
           계가 뚝딱해버릴 수 있는 자동화 영역에 잠식되어갈 것이다.                      당해 자격증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구조기준 상의 안전율은 시공 과정의 오차, 돌발상황들과 건물                 내가 계산자와 연필을 들고 제도판 앞에 앉아 팔근육에 마비가 올 때까
           사용 환경 변화 등 설계 이후 단계의 미래 변수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기 때             지 도면을 수작업으로 그리던 1960, 70년대에는 설계 프로그램이 철근 배
           문에 소위 “VE” 과정에서 무턱대고 다 깎아 먹는 것은 장차 수십 년간 건            근을 자동으로 해주고 철골 부재의 두께, 볼트의 개수와 볼트구멍 위치까
           물을 이용할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리고 단순히 안전              지 지정해주는 시대가 올 것을 예상치 못했다. 지금과 같은 기술 발전 속도
           율을 줄여 구조계산을 다시 해보는 정도로도 시공사나 투자자의 눈이 휘둥               로 10년만 더 지나면 웬만한 건물은 건축사가 구조설계 프로그램에 설계도
           그레질 정도로 현저한 물량 절감이 있었다면 기존 구조계산을 대충 했다는               와 적용 공법 관련 변수 몇 가지를 입력하면 어떤 구조기술사도 흠을 잡을
           뜻이며, VE라기 보다는 허술했던 기존 구조계산의 하자 보수라고 보아야               수 없는 훌륭한 구조계산서가 바로 출력되어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64    건 축 구 조    2022 _ 07 _ 08   제29권 / 제04호
   61   62   63   64   65   66   67   68   69   70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