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건축구조 Vol. 29 / No.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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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칼럼 | 0 3
마루는 불평하지 않는다. 찍히고 밟히고 뛰어도 아파하지 않는다.
따뜻한 온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벽창호로 막힘을 거부한다. 방밖에
앉아서 계절의 변화를 밤낮으로 바라보지만 감탄의 소리도 지르지 않
고 무표정이다. 앞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간섭하지 않고 비바
람이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 마루는 집안 생활의 동선을 이끄
는 으뜸자리이다.
경남 함양에 있는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을 찾아 민박을 한
적이 있다. 마을 전체가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답게 고샅길마다 고풍
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발길을 멈춰 세운다. 솟을대문의 지붕을 받치
고 있는 뒤틀린 서까래에서 애잔한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어난다. 단
정하게 배열된 집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듯이 솟아오른 팔짝 지붕의
회원 칼럼 추녀마루마다 대학자의 기품이 서려 있는 듯하여 고개를 숙이게 한
0 3 다. 집마다 마당을 향해 넓은 가슴을 열고 한적한 마루들이 빈자리를
내어주며 앉으라 한다.
사랑채가 고즈넉한 마당의 배경이 되어 해 질 녘 노을에 오백 년 노
송老松의 목리木理를 마루에 새겨 놓는다. 가지런한 세살무늬의 방문
을 열고 옛 주인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나올듯하여 눈가
에 긴장감이 흐른다. 애초엔 누르스름했을 나무의 속살이 세월의 풍
파에 눌려 거무스름하게 색바랜 널빤지가 친근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요하게 앉아있는 마루들이 단아한 방들을 분리하고 다시 연결하여
5칸의 집을 하나로 묶어놓았다.
마루 을 고우지만 마루는 나무로 시원함을 짜낸다. 돌판은 고단함을 눕히
한옥은 온돌과 마루의 바닥이 중심공간이다. 온돌은 돌로 따뜻함
고 널빤지는 노곤함을 앉힌다. 방은 내밀함을 숨기고 목소리를 가두
지만 마루는 친밀함을 나누고 자연을 끌어안는다. 마루가 있어 소통
을 이루고 방이 있어 정을 나눌 수 있다. 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집 안에 있는 광장과 다름없다. 사람과 자연이 일체가 되어
방과 마루에 가족의 삶을 담는다.
마루는 앉아있는 자리에 따라 이름과 역할이 다르다. 대청마루는
집 안의 중심축이며 성전이다. 후손들이 도열하여 제례를 올리며 마
음속에 조상의 얼을 새기는 엄숙함이 서려 있는 곳이다. 텅 빈 대청에
서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매고 제사음식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옛 어
머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대청은 손님을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는 예절이 담겨있는 곳이다.
뒤편의 들창을 들어 올리면 마당과 뒤안이 하나의 공간이 되어 자연
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멋과 여유를 보여준다. 한여름 밤, 마루
| 임 영 도 | 밑의 빈공간을 채운 서늘한 공기가 널빤지 틈새로 올라와 쾌적한 침
㈜아림구조엔지니어링 실이 되기도 한다. 마루 곳곳에 숨겨진 선조들의 지혜 속에 오늘날의
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편리함이 녹아있다는 생각에 말없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방문을 열고 바깥기둥(평주平柱) 사이로 발을 내디디면 툇마루가
여백의 공간으로 다가선다. 댓돌에 올라 일상의 짐을 벗고 방으로 들
어가는 길목에 있는 의자와 같다. 마루 밑에서 멍멍이는 선잠을 깨
66 건 축 구 조 2022 _ 07 _ 08 제29권 / 제04호